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10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날씨가 가을과 초겨울을 넘나드는 와중이었기에 혹시 더울까 봐 옷을 얇게 입는다고 입었지만 기차를 타자마자 더워지기 시작했다. 11월이라 그런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서인지 창틀에 에어컨도 안 틀어줘서 너무 힘들었다. 기차에서 운동 루틴 유튜브 영상 몇 편을 보다가 1시간 정도 잠들었다. 잠에서 깼을 땐 승차 직전에 테이크 아웃한 아메리카노가 거의 다 식어있었다. 온기가 다 사라지기 전에 급하게 마시다 보니 대전역에 도착했다. 승강장 바로 앞에서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역 바로 앞 주차장에서 미리 예약해둔 쏘카를 찾았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설렜다. 차에 앉아 현충원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작년 여름 처음 현충원에 갈 때와는 또 다른 마음, 느낌이었다. 주말이라 차가 많긴했지만 길이 쉬웠다. 큰 문제없이 30분 정도 달려 현충원 입구에 도착했다. 명절 연휴가 아닌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현충원에 와있었다. 주차할 곳이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작년에 찍어뒀던 임시 묘비 사진의 인식번호 다섯 자를 되뇌었다.
현충원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가 외운 다섯자리 수는 총 8자리 중 일부에 불과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비슷한 수 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장군 묘역, 전사자 묘역 등 구역별로 나뉘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돌고 나서야 검색해볼 생각을 했다. 검색하니 어느 묘역, 몇 번째 구역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시 차를 돌려 7 묘역 근처 주차장에서 내렸다. 일반 도로에도 차가 빼곡해서 당연히 위쪽엔 주차할 곳이 없겠거니 생각하고 오르막을 따라 한참 올라가 보니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이미 올라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형버스를 타고 와서 봤던 풍경이 그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 묘비가 있었던 자리를 짐작으로 찾아가다 드디어 친구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찾았다. 인사 한마디 없는 친구였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의 멋쩍은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친구에게 다가갔다.
작년 여름 느꼈던 감정과 많이 달랐다. 2019년은 거의 1년 내도록 슬프고 힘들었다. 난생 처음 겪는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무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해주신 중학교 선생님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길게 둘러서 하셨다. 참 감사했지만 그땐 어떤 말도 와 닿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든 문득 친구 생각이 났고, 웃고 평소처럼 행동해도 금방 슬퍼졌다. 적어도 몇 년은 이러겠거니 생각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1년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아직 친구가 많이 그립긴 하지만 더 이상 일상생활 도중에도 슬프거나 갑자기 친구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고작 1년도 안돼서 이렇게 됐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친구는 새로운 삶을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추억에 남겨두고 놓아주기로 했다. 예전엔 친구에 대한 감정 중 2할은 원망이었고, 나머지는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지금은 그냥 매일같이 만날 수 있을 때의 그 감정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충원에 안장될 때 임시묘에 흙을 덮어주었다. 고속버스를 대절해서 올라왔는데, 친구의 유골을 버스에 태우고도 나는 3시간이 넘게 자다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현충원에 도착했다. 그래서 반년 정도 지나니 조금 무뎌지긴 했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비석 하나 남은 친구의 모습을 보니 또 눈물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슬픔보다는 반가움이었다. 한참 비석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하다보니 우리가 음식 같은 걸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짧은 인사만 하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현충원 정문 쪽에 있는 보훈매점에서 뭐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정상 영업을 하고 있어서 차를 타고 빠르게 다녀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치킨이라도 사 왔을 텐데.. 매점에는 과자나 먹태 같은 종류밖에 없었다. 맥주 3캔과 친구가 매점에서 자주 먹던 도리토스, 빼빼로 등을 샀다. 비석 위에 올려두고 나는 밀키스로, 다른 친구들은 캔맥주로 짠을 쳤다. 친구가 듣고 있는 것처럼 시비도 걸고, 장난도 치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에 꼭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며 코팅해온 사진을 걸어두고 작별했다.
현충원도 갈겸, 대전 여행도 하려고 올라갔던 거라 현충원에서 내려온 후 본격적인 대전 여행을 시작했다. 사실 여행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한 게 당일치기 일정이었고 '노잼시티' 대전으로 갔던 거라.. 그냥 여행보다는 놀러갔다. 그래서 카메라도 안들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갔다. 현충원에서 나오는 길에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에 들렀다. 순천만 국가정원을 엄청 압축시켜놓은 모양새였는데 핑크 뮬리도 거의 시들었고, 단풍도 별로 없어서 딱히 볼 게 없었다. 산책하는 사람은 정말 많았다. 3시간 대여한 차량 반납 시간이 촉박해서 5분 정도 공원을 걷다가 사진 한 장씩 찍고 차로 다시 돌아왔다. 문제는 이 공원은 주차장이 직선형이었는데, 차를 대면 그 옆으로 차가 겨우 한대 지나갈 간격이었다. 거기다 입구와 출구가 모두 같은 곳이라 나가려는 차와 들어오는 차가 계속 눈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서 들어올 때도 꽤 고생했는데 나갈 때는 연달아 들어오는 4대의 차량에게 길을 가까스로 비켜주고 겨우 도로로 나갈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나오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도로에도 차가 너무 많았던 탓에 결국 10분정도 늦게 차를 반납하게 됐다. 추가로 페널티 만원이 붙었다.
차를 반납하고 다시 대전역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4시가 다되었다. 아침은 물론 점심도 못먹어서 배가 한참 고팠는데 대전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은행동'이라는 곳을 잠깐 구경하고 밥을 먹기로 했다. 부산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젊은 사람이 많았고 어딜가나 있는 체인점들이 줄지어있는 번화가였다. 친구가 맛집이라고 선택한 곳들은 전부 쉬는 날이거나 영업시간까지 멀었다. 근처를 크게 한 바퀴돌아 결국 고기를 먹었다.
고기를 먹으면서 소맥 몇잔도 같이 마셨지만 술기운이 올라올 정도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네 학교 근처로 가기 전에 그 유명한 성심당에 들러 튀김소보루를 사고 코인 노래방에 가서 30분 정도 놀았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택시를 타고 대학 근처로 갔는데 내가 상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 학교와 달리 건물이 뿔뿔이 흩어져있었고, 캠퍼스 주위는 대부분 오피스텔이나 기숙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거의 없었다. 진짜 심심하겠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라 그게 나름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발견한 씽씽이를 타다 나이를 먹었음을 체감했다. 어릴 땐 몇 바퀴를 돌아도 멀쩡했는데 이제는 타자마자 어지러워서 두통이 왔다. 놀이터에서 20분 정도 놀다가 얼떨결에 친구를 따라 캠퍼스 투어를 했다. 친구네 건물은 바로 앞에 있었지만, 의도치 않게 캠퍼스를 가로질러 불이 다 꺼진 건물들을 구경했다. 평지가 아니라서 계단과 오르막을 계속 오르며 1시간 정도를 걸었다. 진이 다 빠질 무렵 친구가 진짜 엄청난 건물이 있다고 해서 간 곳에 카페가 있어서 커피나 한잔 마시려고 했는데 마감시간이었다. 우리는 그제야 술을 마시러 갔다.
처음 가려고 했던 술집도 영업을 안해서 그 옆에 있는 다른 술집을 갔다. 안주는 양이 너무 적었고, 나오는데 한참 걸렸다. 술도 회전율이 낮은지 쓰기만 하고 맛은 하나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며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근처 이자카야로 장소를 옮겼는데 술도 달고 안주도 맛있었다. 우리끼리 마시다 친구 후배 2명이 와서 같이 조금씩 술을 마시고 10시쯤 우리는 대전역으로 돌아왔다.
부산에 도착하니 자정을 한참 넘겼다. 하루 종일 움직인 데다 술까지 한참 마시다 보니 너무 피곤했다. 막차는 이미 진작에 끊긴 시간이라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사진도 딱 3장 찍었고, 많은 곳을 본 것도 아니지만 8월 이후 첫 여행이라 그런지 아니면 후련함 때문인지 즐겁고 행복했다.
다음날 출근할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지만 맥락없는 고퀄리티의 꿈을 꾸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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