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다들 오사카 4박 5일은 길다고 했지만, 2박 3일로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나는 아무리 가까운 나라를 가더라도 해외여행이라면 기본적으로 5일은 잡고 가는 편이다. 여유롭게 많이 보려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행에 질리기 위해서이다.
5일 동안 아침 일찍 움직이고, 한 손엔 카메라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 한참을 걸으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다. 음식도 처음엔 맛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자극적인 맛이 그리워진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 의무처럼 바뀌는 것이다. 5일이 딱 적절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에 질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즈음 여행을 마쳐서 아쉬움과 여운을 남기지만, 귀국 후 3개월간 해외여행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번 여행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셋째 날까지 질릴 만큼 봤다는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 봤다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질리기보다 이틀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 후회스럽고 아쉬웠다.
오사카는 오늘 하루 맑음
일기예보를 보고 미리 어느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오늘 하루만 맑았다. 근데 진짜 어정쩡하게 맑은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늘이 깨끗했다. 햇빛이 비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날씨는 맑아졌지만 기온은 오히려 내려가서 추위에 떨며 여행을 해야 했다.
눈을 떠보니 더워서 아무도 안 올라간 복층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자는 방향도 베개와 반대로 누워있었는데, 슬리퍼가 머리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비좁은 곳에서 어떻게 돌아 누운 건지 모르겠다. 계획을 짜며 내일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술이 너무 취해서 알람은 무슨 양치도 못하고 잠들었다. 여기서 술 때문에 오후 12시에 일어났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겠지만 여행의 신은 이 날 하루만큼은 우리 편이었다. 내가 자는 줄도 모르고 기절했던 내가 9시 6분쯤 번쩍 눈을 뜨고 움직였다. 전날 밤 거하게 마셨던 사케와 안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케는 1/3 정도 남아있었고, 안주도 거의 새 거였다. 다행히 부지런하게 준비해서 계획대로 10시에 숙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딱히 숙취가 있지는 않았지만 너무 힘들었다. 아무리 깔끔해도 25도는 나에게 큰 벽이었다. 김치찌개로 이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아직까지 안 먹어본 일본음식을 먹기 위해 아침은 우동으로 정했고, 다행히 숙소 가까운 거리에 매콤한 우동이 있었다. 맛있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매콤함은 아니어서 아쉬웠다. 국물까지 거의 비울 정도로 다 먹고 밥은 많이 남겼다. 도저히 들어가지가 않았다. 완벽하게 해장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계획대로 움직이기 위해 출발했다. 김치가 너무 그리운 순간이었다.
전날 세운 우리 계획은 이랬다. 숙소에서부터 거리가 먼 우메다 전망대, 주택박물관, 오사카 수상버스, 강 근처 카페. 이렇게 4군데를 순서만 정하고 혹시 시간이 남으면 오사카 성이나 근처를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가는 방법은 그때마다 찾아보기로 했다. 우동집을 뒤로하고 스카이빌딩으로 이동했다.
스카이빌딩은 숙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참 걸리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걷고 지하철 타고 잠깐 움직이니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빌딩 모양을 미리 안 보고 가서 어떤 빌딩이 전망대인지 찾는데 조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망대 건물을 찾아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데 39층에 매표소가 있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우리는 맞는 건물로 들어오긴 했지만, 우리가 타는 엘리베이터는 9층이나 21층까지밖에 없었다. 우리는 직통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서 긴 복도를 헤매면서 2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겨우겨우 39층에 올라오니 뷰가 달랐다. 이렇게 마음 편히 하루 종일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마지막이니 기분을 풀라는 의미로 오사카가 날씨를 조금 에누리 쳐준 것 같았다. 하늘이 아주 파란색이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결제하는데, 이 곳도 오사카 패스가 있으면 무료입장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입장권을 가지고 한층 더 올라오니 건물들이 더 작아 보였다. 다국적 외국인들이 창가 자리에 이미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래도 월요일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고 한적했다. 바깥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창가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찍을걸 후회된다.
40층보다 위로 올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펜스가 꽤 높아서 건물 내부에서 창문을 배경으로 찍는 것보다 예쁜 사진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리를 거치지 않고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다만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숨쉬기 힘들 정도였다. 한없이 작아진 건물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처음 보는 오사카의 맑은 하늘에 빠져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다음 일정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가면서 공중정원을 보려고 했는데, 우리가 생각한 공중정원의 이미지는 높은 빌딩 옥상에 정원이 잘 꾸며져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스카이빌딩 입구 쪽에 초라하게 나무 몇 그루 심어져 있었는데 출입도 할 수 없었다. 눈으로 한번 훑고 주택박물관으로 떠났다.
주택박물관은 10층 정도의 건물 8~9층에 과거 오사카의 주택 양식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오사카 패스가 있으면 입장료 무료였다. 사진 촬영은 가능했지만 백팩이나 카메라를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택박물관에 들어갈 때쯤 비가 몇 방울 떨어졌는데,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탓에 박물관에서 나오면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내부로 들어갔다.
일본 전통의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지만, 패스가 없다면 굳이 갈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크지도 않아서 다 보는데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 내부에 주택이 많지만 거의 비슷하게 생겼고, 콘텐츠도 기모노 체험이나 전통 놀이체험 이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사진 찍을 각도 얼마 안 나왔다. 전통 가옥에서 이런 일반적인 옷을 입고 있으니 사진이 대부분 어색하게 나왔지만, 기모노 체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금방 둘러보고 나왔다. 먹구름이 조금 남아있기는 했는데 비는 그쳤다.
세 번째 코스, 아쿠아 라이너 탑승을 위해 오사카성 근처에 있는 항으로 갔다. 라이너를 운영하는 회사가 게이한 노선을 운영하는 회사랑 같은 것 같았다. 신기했다. 일본에 와서 찐돈가스는 먹은 적이 없는 것 같아 사진에 있는 돈가스를 먹었다. 부드럽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다행히 퍽퍽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단무지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물렸다..
라이너는 매시간 정각마다 운항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2시 5분이라 3시에 타기로 하고 밥을 먼저 먹었다. 그런데 돈가스가 생각보다 너무 늦게 나와서 조금만 늦었다면 4시까지 기다릴 뻔했다. 다행히 십 분 정도 남겨놓고 식사를 마친 후에 탑승하는 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래에 보이는 배가 아쿠아 라이너다.
우리 예상과 다르게 지붕과 옆쪽이 유리로 막혀 있었다. 도톤보리에서 타고 다니는 그 배를 기대했는데 도톤보리 운항시간보다 3배 긴 1시간 운행이라 그런지 창문을 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패스 덕분에 무료로 탑승했다. 오사카 성 근처를 왕복하는 코스로 탔기 때문에 지나가며 오사카성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주변에 있는 큰 건물들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보였고, 강은 너무 더러웠고, 창문도 낮아서 볼 수 있는 거리가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처음 탔을 때 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갔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나도 똑같이 꿀잠을 자게 되었다. 다들 자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30분 정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밖을 구경하다 나머지 30분 정도는 졸고 나니 처음 탑승했던 항구에 도착했다. 이걸 단순히 관광용으로도 많이 탑승하지만, 택시처럼 항 사이를 이동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현지인도 많이 보였다.
시간이 많이 남았기도 했고, 오사카 성을 제대로 못 봤지만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이것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사실 나고야성이나 오사카성이나 큰 차이는 못 느끼겠다. 뭐 엄청 크게 지었다고 그러던데 내 눈에는 그냥 똑같아 보였다. 성을 구경하러 간 건 아니고, 성을 둘러싼 연못과 강가에서 사진이나 찍으려고 갔는데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해도 조금씩 내려앉는 오후인 데다 푸른 나뭇잎이 많아서 봄처럼 느껴졌다.
첫날 벚꽃으로 착각했던 매화들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매화 정원이었나 이름이 매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아직도 매화랑 벚꽃이랑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겠다. 둘 다 똑같이 생긴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카페에 가는 길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일본은 오후 4시만 되어도 다들 하교하고 퇴근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소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는지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왁자지껄 웃으며 삼삼오오 집으로 향했다. 나는 이제 야자를 하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수능을 앞두고 있지도 않았지만 우리나라와 다르게 학생들이 저렇게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고 부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피곤함과 찌듦이 아니라 즐거움이 보였다.
오사카성을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고, 성에 올라가 보지는 않고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뭐 역사 탐방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니 굳이 넘의 나라 고대 성까지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브루클린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카페였다. 우리나라 유명 카페 감성에 더해 창문을 열고 나가면 강가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내부에는 꽃도 파는 카페다. 매일 먹는 커피가 익숙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먹긴 싫어서 처음 보는 메뉴를 골랐다.
Red eye라는 커피와 초코 도넛, 형은 엄지손가락만은 마끼아또와 초코 도넛을 주문했다. 정확히 무슨 커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좀 쓴 커피 같았다. 너무나 감성 저격이었다. 맑았던 하늘이 조금씩 노을로 뒤덮이며 건물도 주홍빛으로 물드는 강가에 앉아 커피를 먹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는데, 오늘 하루 일정이 가장 빡빡했음에도 가장 빨리 끝났다. 다른 날 같았으면 오후 5시에 일정을 끝내는 게 아쉽고 뭔가 찝찝했을 터인데 이 날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며 만족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오늘이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지만 더 이상 어딘가를 가지는 않기로 했다. 오늘은 그냥 숙소에 일찍 들어가서 조금 쉬다 저녁 먹을 때쯤 다시 나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일본에 와서 가장 많이 사진을 찍었다. 한 장 한 장 보정하다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끼니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며 숙소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눈에 보이는 것마다 술집이거나 우리가 한 번쯤 먹었던 메뉴들이었다. 먹을만한 것이 없을지 구글 지도에 검색해보니 웬만한 식당은 다들 1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결정장애와 길치를 모두 갖고 있는 우리 둘은 밥을 먹으러 나선 지 1시간이 다 되도록 헤맸다. 너무 충격이었던 건 지도를 보지 않고 돌아다니다 보니 다시 숙소로 돌아왔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큰 충격을 받고 그냥 이제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먹기로 했다. 그럼에도 식당을 한 번 더 거르고서야 마감 직전인 가게에 가서 매콤한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육수를 깊이 우려낸 진라면 맛이었다.
저녁 공복이 길어졌는데 양도 그리 많지 않아서 우리는 이미 3일간 우리의 야식을 챙겨준 숙소 근처 LIFE라는 대형 마트를 갔다. 마지막 저녁은 어떤 간식을 먹을지 한참 고민하며 이것저것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오사카 끝났다.
숙소 복귀를 끝으로 여행 마지막밤의 일정이 모두 종료됐다. 아쉬움은 없었다. 앞서 놓친만큼 마지막날 하나라도 더 보려는 조바심도 내지 않았고, 천천히 돌아다니며 계획도 유동적으로 바꿨다. 셋째 날의 교훈을 토대로 '여행에서 만큼이라도 여유를 찾자'며 걷는 내내 되뇌였다. 여행에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마음이 편했다.
마지막 밤이 아쉬울 법도 하지만, 술은 맥주 한캔 정도로 끝냈다. 다음 날 비행기가 저녁 8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뭐할지를 고민하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새벽 1시반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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